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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들, 빛들, 이름들
Winds, Lights, Names

Side Room · 2026 · Exhibition Text

한국어English

빛.

무언가 지나간 것 같았는데, 이내 고요만 남았다.

어떤 잎. 어떤 종이 조각. 읽히지 않은 이름 하나. 바람은 그것들을 데려가지 않았다.

잠시.

다시 빛.

나는 그것들을 구별하지 못했다.

어떤 이름을 불렀다가, 어떤 이름이 잠시 머물다가, 이내 잊었다.

다시 볼 수는 없겠지.

지나간 뒤에야 다시 오겠지.

— 전진표 작가 노트 중

어린 시절의 오후는 이상하리만큼 길었고, 그 때의 기억은 종종 사건보다 감각으로 남는다. 창가에 앉아 있으면 빛은 계속해서 조금씩 자리를 옮겼고, 어디선가 솔솔 불어오던 바람이 사라지면 괜시리 아쉬웠다. 과일 트럭의 알아듣기 힘든 음성과 저 멀리서 들려오는 공사장 소음이 뒤섞인 듯한 이름도 모를 소리 하나가 꽤나 긴 시간 동안 귓가에 머무르기도 했다.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창살 넘어 보이던 형상 하나에 별 이유 없이 마음을 빼앗겨 턱을 괴고 한참을 쳐다본 것만 같기도 하다. 분명 스쳐 지나간 장면 혹은 감각이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그것들은 어디론가 흩어진 채 우리 기억 한 켠에 머물다가, 예상치 못한 어느 날 문득 다시 떠오른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감각의 잔상에서 시작된다. 전진표 작가에게 어린 시절의 창살과 창틀, 여기저기 붙어 있던 판박이 스티커, 하루를 건너며 조금씩 달라지던 빛은 하나의 선명한 장면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시선이 머물렀던 방식, 무언가를 바라보던 거리, 설명할 수 없는 기분과 리듬으로 남아 있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은 것은 기억의 내용이 아니라 기억이 남긴 감각이었다.

전시의 제목인 《 바람들, 빛들, 이름들 》 역시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가리킨다. 바람은 지나가고, 빛은 끊임없이 변하며, 이름은 불렸다가 잊혀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화면 속에 머무는 빛을 품은 색, 그리고 반복되어 나타나는 창살을 닮은 격자 무늬 구조와 타원형의 형상들은 바로 그 남겨진 감각들의 자리처럼 보인다. 어떤 것은 시선을 나누고, 어떤 것은 서로 멀리 떨어진 기억들을 한 화면 안으로 불러들인다. 이들은 특정한 대상을 설명하기 위한 이미지라기보다, 오래전 스쳐 지나간 순간들이 다시 관계를 맺는 방식에 가깝다.

이번 전시에 놓인 작품들은 과거를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 기억은 언제나 흐릿하고, 원래의 모습 그대로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작가는 희미해진 감각들이 현재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다시 떠오르는지, 사라진 줄 알았던 것들이 어떻게 새로운 형태로 머무는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무엇을 보여주는 그림이라기보다,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표면에 가깝다. 빛은 지나가지만 잔상을 남기고, 이름은 잊히지만 어딘가에 흔적을 남긴다. 화면 속 반복되는 색과 형태들 역시 단순히 같은 것을 되풀이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늘 미세한 차이와 흔들림이 있다. 마치 같은 하루가 없고 같은 빛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장면을 잊는다. 그러나 어쩌면 잊혀진 것은 장면뿐일지 모른다. 한때 좋아했던 것들. 오래 바라보던 것들. 그것들은 기억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가, 어느 날 뜻밖의 빛이나 냄새, 소리 하나를 만나 다시 떠오른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 바람들, 빛들, 이름들 》 은 단지 전진표 작가 개인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조명하는 전시가 아니다. 작품들은 과거를 이야기하기보다, 그러한 떠오름의 순간을 닮아 있다. 선명하게 재현된 기억이 아니라, 막 기억날 듯 말 듯한 감각. 이름을 붙이기 직전의 장면. 손을 뻗어 잡으려 하면 다시 희미해질 것 같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무언가. 그래서 이 전시는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감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상하게 한동안 계속 생각나던 할머니가 쥐어준 과일 한 조각의 강렬한 달콤함, 그해 여름의 습도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별 의미 없이 교과서 한 켠에 반복해 그리던 모양과 무늬들, 정확한 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음정과 리듬은 그대로 흥얼거릴 수 있는, 단지 내 놀이터를 뛰놀며 다같이 외치던 주문 같은 구호들..

전시장을 거닐다 보면 문득 한 번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잊히지 않았던 그런 기억 하나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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